서평 “슬기로운 부교역자 생활 2편” -사역은 관계입니다
저자 : 박현덕
출판사 : 유페이퍼
출판일 : 21년 1월 30일
형식 : 전자책으로만 출판
<책 요약>
부교역자들간의 관계
보통 부교역자들끼리 같은 사무실을 이용하고,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데, 교역자들 간에 관계가 깨지는 것보다 참담한 일은 없다.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영적으로 힘들어지며, 교회에도 큰 해악을 끼친다. 다른 부역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개인의 영성과 사역의 질을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1. 공과 사를 구별하라
예장통합의 경우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도 직원에 포함된다. 그 중에 교역자는 유급직원이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저, 상처 받았어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교역자가 할 말은 아니다. 교역자가 사역할 때 사적인 감정을 자꾸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토라지고, 말을 안하거나,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와 맞는 사역자들끼리만 어울린다. 그 사람 때문에 교역자 사이에 편이 갈리기도 한다. 얼굴에 ’나 기분 나쁘니까 건들지 마세요‘라고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프로는 감정으로 사역하지 않는다.
교회도 조직이기 때문에 위계질서가 있다. 담임목사, 부목사, 전임전도사, 교육전도사가 계급이나 권력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과 자기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저자도 부교역자로 사역하다보면 마음이 힘들 때가 있는데 담임목사님을 뵙고 정중하고 진솔하게 마음 상태를 말씀드린다고 한다.
전도사님들 중에 평일에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에 사역하는 분들, 신학교를 다니면서 주말 사역하는 분 중에 스트레스를 교회에서 풀거나, 사역을 알바로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공과 사를 구별 못하는 모습이다.
공과 사를 구별하라는 것은 첫째, 사적인 감정으로 사역에 임하지 말라, 둘째,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을 공평하게 대하라, 셋째, 부서의 서열을 존중하라, 이것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상담할 대상과 보고할 대상을 명확히 하라는 의미임, 넷째, 직책에 맞게 행동하라. 직책을 넘어서거나 남용하면 안 된다, 다섯째, 남성 사역자와 여성 사역자는 적절한 거리를 두라. 사적 감정이 생길 위험성은 늘 있다.
2. 남녀 사역자와의 관계
이건숙 사모님의 ’사모의 품격‘을 꼭 읽어보라. 남녀 관계는 애매한 점선이 아닌 확실한 실선을 그어야 한다.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여성 사역자 혹은 여성 성도와 단 둘이 만나지 말고, 불가피하면 반드시 cctv가 있는 곳에서 만나라. 아니면 카페를 이용하라. 절대 밀폐된 곳에 단 둘이 있어선 안되고, 문이나 창문이라도 개방해 놓아라. 어쩔 수 없이 여성과 둘이 차를 타면 뒷자리에 앉게 하라. 장거리는 이것조차도 하면 안된다. 친밀하게 지내는 것과 구별해야 한다.
3. 먼저 사역 중인 교역자를 존중하라
먼저 사역 중인 교역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교회에 빨리 적응하고, 사역이 한결 부드럽게 진행될 수 있다. 아무리 내 목회경력이 많아도 그 교회만큼은 먼저 사역 중인 교역자가 더 많이 알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부목사이고, 먼저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가 전도사여도 상관없다. 내가 교회를 파악하고 적응하기 전까지는 그 분보다 잘 모른다고 봐야 한다. 그가 정보를 잘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대한 인내하며 협력을 구하라. 저자의 경험으론 최소 1년, 최대 2년까지 배운다는 마음으로 전임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4. 월권하지 말라
예장통합에서 당회는 주로 정책을 논의하고, 제직회는 예산을 집행한다. 그런데 교회 정책을 제직회를 통해 결정하려 한다든지, 당회가 제직회가 허락하지 않은 예산을 집행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를 위하는 마음이라고 해도 이것은 월권이다. 교회는 여러 기관과 부서장이 있는데 장로님이 자신이 맡은 부서도 아닌데, 장로라는 직책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월권이다.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지만 강요나 명령이 되면 월권이다. 월권행위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첫째, 교회가 화평을 도모할 수 없다. 교회가 화평하려면 성도들이 우리 교회는 공평하고 원칙을 잘 지킨다는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 월권이 자꾸 발생하면 신뢰에 금이 간다. 교회에서 월권은 나름 업적이 많고 입김이 센 분들이 저지르기 쉽다. 그러다보면 교회가 모든 선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가 아닌 소수 몇 사람의 월권으로 일이 돌아가는 비상식적인 공동체가 된다.
둘째, 교회조직과 행정질서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월권하는 분의 주장이 먹히면 그분을 중심으로 서서히 세력이 형성되어 정치그룹, 특권층이 탄생한다. 그들은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위에 자신들이 있다는 특권의식을 갖게 된다.
셋째,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한마디로 동역할 마음이 사라진다. 내가 맡은 일에 다른 사람이 함부로 관여한다면 사역할 마음이 나지 않고, 그러다 보면 교회를 떠나는 성도도 나온다.
이것은 부교역자들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도 자기도 모르게 월권행위를 했던 기억들이 있다고 했다. 관계가 서먹해진 부교역자와 이야기하다가 ’당신이 월권했었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이해가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서로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도와준다고 한 것이어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월권일 수 있다. 혹은 어떤 급한 상황에서 처리한 일이 충분한 소통 없이 진행되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 있다. 그래서 직분의 역할과 책임이 클수록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려면
첫째, 스스로가 계급의식을 버려야 한다. 설령 담임목사님의 마인드나 교회 분위기가 계급적인 면이 있어도 교회의 모든 직분은 절대 계급이 아니고, 특히 부교역자들 간에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면 곤란하다. 부목사라고 해서 교육전도사의 사역에 함부로 관여하지 말라. 전임자라고 후임자에게 지시를 해도 안 된다. 도움만 주고 명령은 하지 마라.
둘째, 부교역자들 간에 자주 소통을 하라. 앞 뒤 없이 그냥 말을 하면 상대방은 내 사역에 참견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게 먼저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월권행위를 할 때 신뢰가 깨지고, 신뢰가 먼저 깨지면 내가 월권당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셋째, 명령조가 아닌 부탁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게 좋다. ’이렇게 하세요‘가 아닌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주실래요?‘등 상대방 입장에서 내가 명령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라.
넷째, 각자 맡은 부서 간에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 교회사역이란 게 부서가 엄격히 구별되어서 사역이 진행될 수 없는 부분들이 참 많기 때문에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서로 협력해야 하는 일이 있을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내가 어떤 일로 그 부서 관계자와 연락할 예정이라는 것을 담당교역자에게 미리 말해주는 게 좋다.
월권의 문제는 평소에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 부교역자의 실수가 발생했을 때에 담임목사님이 바로잡아주시면 좋지만, 많은 교회에서 미흡한 편이다. 그래서 평소 부교역자들 간에 충분한 소통화 상호신뢰가 있는 것이 도움이 된다.
5. 말을 안 드는 부교역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부목사 입장에서 전임전도사나 교육전도사가 말을 안 듣는 경우와 반대로 부목사가 전도사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이다. 사역자들은 고집이 장난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교회에 맞는 사역방법을 알려주어도 잘 듣지 않으려는 사역자들이 있다. 자신의 사역스타일이 뚜렷하거나 인격이 덜된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 그렇더라도 최대한 가르쳐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듣지 않는다면 차라리 기다리며 참는 편이 낫다.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주어진 일 하는 편이 낫다. 혼내서 사람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도사님인데 부목사님이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대해서 힘든 분도 있을 것이다. 이때 조심할 것은 문제를 키우지 않는 것이다. 되도록 부목사와 이 문제를 상의해서 대화로 푸는 게 좋다. 사람은 상대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부목사와 사역하면서 어려운 부분을 말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필요하다. 그럼에도 부목사가 변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아라. 또한 자신을 돌아보라. 관계는 늘 일방적 잘못이 아닌 서로의 부족한 면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6. 경쟁하면 함께 망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큰지 서로 논쟁했던 것처럼 부교역자들간에 경쟁심이 장난이 아니다. 경쟁심을 부추기는 담임목사들도 있다. 돈과 이성보다 더 집요하게 목회자를 망가트릴 수 있는 게 경쟁심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인드는 섬김이었다. 경쟁이라는 고질적인 병을 치유하지 않으면 자신도, 교회도 망가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첫째, 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합창을 하듯이. 개성을 죽이거나 적극적으로 사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역자보다 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 성실한 사역자가 되고 연애인이 되려고는 하지 말라. 성도들의 애정과 관심은 교역자를 교만하게 하거나 다른 사역자에게 관심이 가는 것을 질투하는 독이 될 수 있다.
굳이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부교역자는 때가 되면 사역지를 옮긴다. 사역지를 옮기면 성도들에게서 나는 잊혀지고 새로운 교역자들에게 관심이 쏠린다. 성도들에게 인기있는 사역자가 되는 것은 정말 헛되다.
담임목사와의 관계
부교역자는 담임목사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가장 어렵고, 가장 민감하고 스트레스가 많다. 부교역자들끼리 어려움을 토로할 때 단골메뉴로 담임목사님과의 관계가 압도적이다. 저자는 반대로 담임목사들 입장에서는 장로들과의 관계가 큰 부담이면서 부교역자와의 관계도 큰 스트레스라는 말씀을 심심찮게 들었다고 한다.
부교역자 경험이 있는 담임목사가 부교역자 마음을 더 잘 알아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부교역자 경험이 있는 분들은 부교역자 입장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가 좀 더 있겠지만 결국은 그분의 목회관과 인품의 문제에 달려있다.
부교역자는 담임목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사역하는게 중요할까?
1.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전혀 다르다.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이 강하면 남의 시선이나 판단에 크게 민감해하지 않는다. 반면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눈치를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건 내가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한번 해보지 뭐. 즐겨보는 거야“라는 마음으로 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실패는 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잖아. 수고했어“이런 사람이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난 안 된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뭐라 할까?“라고 마음 쓰는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자존심이 강했떤 인물이 사울왕이다. ’사울을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b)라고 할 때 자기 가슴에 창이 꽂히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비참해졌다.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자존심은 약해지고 자존감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2. 부교역자는 담임목사님의 종이 아니다. 절대 담임목사님께 종처럼 굴면 안 된다. 설령 그런 분위기가 있어도 그러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교역자로서 교회를 잘 섬길 수 없고, 결과적으로 담임목사님의 사역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 피해는 교회에 간다.
3. 담임목사님께 굽실거리면 그 피해는 담임목사님께 간다. 성도들이 담임목사님을 권위의식이 강한, 대접받기를 원하는 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섬김의 본을 보이려고 애쓰는 담임목사님일 경우 이미지에 큰 타격이 올 수 있다. 부교역자는 성도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담임목사님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섬겨야 한다. 그 옆에서 긴장하는 듯한 표정을 짓거나 굽실거리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부교역자가 담임목사님께 굽실거리고 무서워하면 제대로 보고도 하기 어렵다. 의도치 않게 담임목사님을 속이는 일까지 벌어질 수 있다. 담임목사님 앞에서 굽실거리지 말라는 뜻은 담임목사님이 설령 혼을 내도 기죽지 말라는 뜻도 들어 있다. 담임목사도 사람이라 부교역자가 잘못하면 화를 낼 수도 있고, 어떤 일에 대해 오해할 수 있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혼나는 게 무서워서 담임목사와 소통을 꺼리면 사역이 정말 어려워진다. 성도가 담임목사님께 어떤 내용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할 때에 ’저는 못해요. 직접 하세요‘라고 떠넘기는 경우도 있다. 사안에 따라서는 성도가 직접 담임목사님을 뵙는게 맞는 경우가 있지만, 단지 내가 담임목사님을 뵙는게 부담돼서 부탁하러 온 성도를 그냥 돌려보내는 건 잘못이다.
4. 담임목사님을 두려워하면 사역이 위축된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달란트 받은 종이 돈을 땅에 감춘 이유는 주인을 악한 사람으로 보고 혹시 장사를 하다가 돈을 날리면 혼나거나 징계를 받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담임목사는 주인, 부교역자는 종이라는 말이 아니다. 부교역자로 지내다보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 생긴다. 그러면 적극적인 사역이 힘들어진다. 처음부터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열정으로 일하려다가 몇 번 벽에 부딪히거나 담임목사님께 소리를 들으면 사역이 위축되기 마련이다.
5.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말고 계속 대화하는 것이다. 담임목사님은 교회가 잘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부교역자가 교회에 도움 되는 사역을 하는게 느껴진다면 적극적인 협력자가 된다. 일부 담임목사는 자신이 하는 사역보다 부교역자가 하는 사역이 더 잘 되고 활성화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이유가 뭐건 담임목사가 하지 말라면 일단 순종하라. 사역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찾으면서 속도를 조절하라.
6. 모든 것은 사실에서 출발하라.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 이유는 책임을지지 않으려 해서다. 웬만한 담임목사는 사실을 보고하는지, 자신을 속이는지 안다.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 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담임목사는 부교역자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부교역자는 담임목사에게 신뢰감을 줘야 한다. 신뢰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 때문에 혼이 나도 괜찮다. 이런 식으로 신뢰가 쌓일 때 담임목사도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고 자연스레 섬김의 범위가 넒어진다. 담임목사님도 사역에 힘을 보태주실 거다.
담임목사도 부교역자가 자연스럽게 사실관계를 보고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잘못은 지적하더라도 사실적으로 보고한 것 자체는 칭찬해주면 좋다. 다음에도 그렇게 해달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좋다.
7. 담임목사님이 알고 싶은 정보를 전하라. 담임목사님 목회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드리라. ”목사님, 오늘 오후 6시에 000집사님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에 심방 다녀왔습니다“는 사실적인 보고지만 좋은 보고는 아니다. 심방했을 때 성도와 어떤 대화를 나눴고, 상태가 어떤지, 예배 드렸는지, 형편이 잘 안 돼서 기도만 드리고 왔는지 상세하게 보고 드리는 것이 좋다. 서술형으로 보고하는 게 좋다.
”목사님, 오늘 오후 6시 경에 000 집사님이 계시는 서울대병원에 심방 다녀왔습니다. 집사님은 이전에 찾아뵈었을 때보다 좀 나아보이셨습니다. 다친 오른쪽 발목 부분은 아직 통증이 있어서 진통제를 계속 투여하는 중이었습니다. 내일 중으로 x-ray를 찍고 경과를 볼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식사는 잘 하시는 편이라고 합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는데 여러 가지로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신 듯 보였습니다. 다인실이라서 조용히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드린 후에 돌아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고하는 게 좋다.
담임목사님과 심방계획이 있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지 파악하고 그 정보를 목사님께 미리 전해드리면 좋다. 수련회 장소 답사를 다녀올 경우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다든지, 이미 설치된 장비와 교회에서 가져가야할 장비 등을 면밀히 파악해서 보고하고, 밤늦게까지 집회를 해도 괜찮은지, 식당까지 거리는 얼마나 소요되는지, 숙소에는 어떤 물품이 준비되어 있는지 등도 꼼꼼히 살피고 보고 드려야 한다. ex) 한번은 수련회 담사후 보고를 드렸는데 담임목사가 각 방에 파리채는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8. 사역이 진행되는 과정도 알려 드리라(중간보고). 규모가 작은 교회는 담임목사님과 직접 소통하며 보고할 기회가 많고, 대형 교회는 절차가 복집하기도 하고, 대외활동이 많은 담임목사님은 보고드릴 기회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은 부교역자가 보고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창구를 여러 가지로 마련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메일, 전화, 카톡 등. 물론 부교역자는 일의 성격에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 보고해야 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대면보고할 것이 있고, 메일이나 문자로 보고해도 되는 내용이 있다. 급한 내용은 전화를 이용하고, 긴밀하게 상의할 것은 직접 대면하는 것이 좋다.
9. 담임목사의 영적 권위를 존중하라. 영적 권위는 절대로 수평적인 게 아니다. 부교역자가는 절대로 담임목사의 종이 아니고 굽실거리면 안된다. 그렇지만 나와 담임목사의 영적권위가 같다고 생가하면 오산이다. 교회는 영적질서가 바로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교회존립의 토대까지 흔들릴 수 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분란 중 상당 부분이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절대로 부교역자는 담임목사를 앞서가면 안 된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게 싫으면 개척을 하든지, 다른 교회 담임으로 가면 된다. 부교역자는 늘 담임목사 두 걸음 뒤에서, 그만큼 명확히 선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10. 담임목사님이 시키신 일인데 제가 어떻게 합니까. 사역을 하다가 다소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문제로 성도들이 따질 때도 있다. 그럴 때 담임목사님께 책임을 떠넘기려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이 것이 의외로 위력이 있다. 그게 거짓말은 아니다. 담임목사님이 지시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담임목사님이 욕을 먹게 된다. 담임목사님도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회와 상의하거나 부서와 협의해서 일을 진행한다. 그런데 이 사정을 모르는 성도들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만 생기면 담임목사님이 문제라고 단정짓는다. 성도가 담임목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게 되면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저자의 경우는 일단 성도들의 불편사항을 충분히 들어주고, 다시 한 번 알아보겠다고 말한다. 이후 당연히 담임목사님께 상의드린다. 그러면 담임목사님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과 장로님들과 상의할 부분을 구별해서 일을 처리한다. 혹시 성도들이 담임목사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더라도 맞장구를 치면 곤란하다. 지혜롭게 자리를 피하라. 이상하게 말은 돌아서 언젠가 담임목사님 귀에 들어간다.
11. 결정권자와 실행권자. 결정권자는 ’어떤 일에 대한 방향이나 태도를 정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실행권자는 말 그대로 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사람이죠. 단도직입적으로 실행권자에게는 결정권이 없다는 뜻이다. 부교역자의 사역은 대부분 실행권자로서 역할이 많다. 부교역자 입장에서 결정권자는 담임목사님이다. 결정권자가 더 가치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은 오해이다. 결정권자대로, 실행권자대로 중요한 일을 한다.
12. 멘토가 될 만한 목사님을 만나라. 도제교육은 보고 배우는 것이다. 기술, 태도, 인격까지 닮기가 쉽다. 그래서 멘토가 될 만한 담임목사를 만나야 한다. 예를 들어 성장 중심적인 목회를 하는 담임목사 아래서는 그런 스타일의 목사가 되기 쉽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형편상 내가 닮고 싶은 담임목사를 골라가긴 어렵다. 그렇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좋은 것은 닮고, 나쁜 모습은 절대 닮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하는 일이다. 배울게 없다면 적어도 ’이렇게 목회하면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구나‘라고 배우면 된다.
또 한가지 대안은 가상의 멘토를 만드는 것이다. 존경하는 목사님의 사진을 붙이거나 그분의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반드시 멘토가 목사일 필요는 없다. 저자는 소실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꼬,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을 멘토로 생각한다.
13. 담임목사에게 더 중요한 존재는 교회일까? 부교역자일까? 담임목사는 자신의 사역마인드와 맞지 않다고 여기거나, 부교역자와 교회를 섬기는 게 부담이 되거나,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우리교회에서 떠나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조용히 떠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교회에 덕이 되지 않아서다. 사실 교회에서 가장 약하고 힘없는 존재는 부교역자이다. 그래서 처신을 잘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구해야 하고, 동시에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이 땅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다 불완전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성도와의 관계
1. 성도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주라. 교회마다 부교역자를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차이가 있다. 부교역자 직책 자체를 존중하는 교회가 있고, 얼마동안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신뢰감이 생기면 마음을 여는 교회가 있다. 부교역자의 직책을 존중하는 교회는 안정적인 교회일 가능성이 크다. 담임목사에 대한 신뢰가 크고, 전임 부교역자들이 큰 무리 없이 섬긴 교회일 수 있다. 반면에 교역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는 신뢰관계를 먼저 쌓는게 중요하다. 어떻게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
2. 원칙을 지키라. 교역자들이 성도에게 신뢰를 잃는 이유는 원칙을 잘 지키지 않아서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이런 말과 유사하다. ”저 교역자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꼭 그렇게 처리할거야“라는 믿음이다. 원칙을 지킬 때는 두 가지를 고려하라.
첫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바른 원칙을 세워라. 함께 결정한 것을 함부로 바꾸지 말라
둘째, 바른 원칙을 정했으면 성도들에게도 알려주라.
3. 팬을 만들지 마라. 관심을 넘어 팬이 생기면 오히려 독이 된다. 첫째, 부교역자들 간에 갈등이 생긴다. 둘째, 성도들 사이에 ’저 교역자는 어느 성도와 더 친밀하다‘는 인상을 준다. 셋째, 교역자 자신이 교만해진다.
4. 교역자는 언제나 성도님을 공적으로만 섬겨야 한다. 성도님들과 사적인 자리는 무조건 피하라. 성도와 취미생활을 함께 하거나 사적인 식사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작은 교회이거나 담임목사님이 이런 마인드로 사역하는 분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설령 그런 분위기라고 해도 부교역자는 성도들과 친밀하게 지내면 곤란하다.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의 관계가 친밀해지도록 협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담임목사도 자신보다 부교역자가 성도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좋게 보지 않는다. 자칫 동역의 대상이 아닌 경계의 대상으로 보일 수 있다.
5.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 성도들은 시험에 든다. 요람을 만들 때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 정보가 틀려도 큰 문제 삼지 않지만 민감한 성도도 있기에 그런 분들은 따로 체크를 한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겼을 경우 자신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성도도 있다.
성도들은 교역자가 재산이 많고 권세가 있는 성도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고 생각할 때 큰 상처를 받는다. 심방횟수도 편중되지 않도록 잘 조절해야 한다.
6. 말실수 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라. 말은 엎지러진 물처럼 한 번 뱉으면 담을 길이 없다. 정치인들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한방에 가지 않나? 첫째, 신체와 관련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농담을 즐기는 건 좋지 않다. 셋째, 성도의 말을 함부로 끊지 말아야 한다. 넷째, 성도들과 대화하면서 반말을 섞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나이어린 교역자가 어른에게 반말을 섞어서 얘기하는 것은 건방져 보일 수 있다. 나이가 어린 성도에게 반말하는 것도 조심하라. 편하게 지내던 청년이 결혼을 하면 말을 높여주라. 말 실수를 했다면 반드시 사과하라.
7. 성도를 이기려고 하지 말라. 젊은 교역자일수록 혈기가 왕성해서 성도들과 논쟁하고 다투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봐야 교역자만 손해이다.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한다. 성도를 이기는 목회자는 이미 싸움에서 진 것이다. 담임목사 중에는 성도와 당당히 맞서는 분도 있지만 부교역자는 그러면 안된다. 그냥 져주는게 이기는 거다.
부교역자를 단지 담임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만 보지 말고 부교역자 사역도 엄연한 목회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소감>
서울 산정현교회 박현덕 목사님의 부교역자 내공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처음엔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지만 읽을수록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이 책 이외에도 부교역자 리더십에 대한 책들을 두 권 더 읽었는데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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